서주(西周)의 10대 왕이었던 려왕(厲王·재위 기원전 877~841 / 생몰 기원전 ?~828)은 부패하고 사치를 일삼는 왕이었다. 그의 성은 희(姬)였고, 이름은 호(胡)였으며, 아버지인 이왕(夷王)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약 170년 전 건국된 주나라는 초기의 무왕과 성왕의 강력하고도 건전한 통치로 중국 대륙의 제후국들을 거느리면서 천하의 중심이 된 나라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전제왕정이 계속되다 보니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 진 상태였다.
◆ 주나라 10대 려왕, 일하기 싫어하고 주색잡기에만 골몰
려왕의 아버지였던 이왕만 하더라도 제(齊)나라의 애공(哀公)이 그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제후를 끓는 솥에 넣어 삶아 죽여 버릴 만큼 포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려왕은 이런 포악성은 없었지만 일하기를 싫어하는 군주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그는 국인(國人·주나라의 제후)에게 나눠주어야 할 토지와 산림, 소택지 등의 관리권을 빼앗아 그 이익을 독점하여 자신의 사치생활에 탕진했다. 또한 그는 일체의 언로(言路)를 막고 전제정치를 일삼았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길에서도 눈짓만으로 생각을 나눌 만큼 숨 막히는 사회가 됐다. 누구라도 자기가 듣기 싫은 말을 하면 극형에 처했기에 제후들도 왕을 알현(謁見)하러 오지 않아 려왕은 점점 궁궐 속에서 혼자 지내며 술과 여색만을 가까이 했다. 뿐만 아니라 위(韋)나라의 무당을 궁중에까지 끌어들여 백성들을 감시하고 반대세력은 모두 잡아 죽이기까지 했다.
보다 못한 소목공(召穆公)이 직언을 했지만 려왕은 이를 가벼이 흘려들었다. 소목공은 “백성의 말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강물을 막는 것만큼이나 위험합니다. 물을 다스리려면 필히 소통하는 물길이 있어야 물이 바다로 흘러갑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것도 이와 같아 백성들이 마음껏 말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라고 간언했지만 려왕은 귀담아 듣기는커녕 오히려 소목공을 축출해 버렸다.
◆ 민심 폭발, 폭동에 왕위에서 쫓겨나 평생 숨어 살아
민심은 부글부글 끓었고 마침내 폭동이 일어나서 려왕은 쫓겨나 도읍인 호경(鎬京·지금의 산시(陝西) 성 시안(西安) 부근)에서 도망쳐 체(彘·지금의 산시(山西) 성 곽주(霍州) 부근)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상 여왕은 자신이 직접 폭정을 휘둘렀다기보다는 영(榮)나라의 이공 (夷公)을 측근에 두어 경사(卿士) 벼슬을 주고 그에게 국정의 전반을 맡겨 버리고 자기는 그저 주색잡기에만 열중한 것이었다.
◆ 주 왕실 후손, 제상 협치, 꽃 피운 14년 공화정치
려왕이 도망친 직후 사람들이 왕궁에 갔지만 국왕을 찾을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사람들이 후환을 없애려 왕자를 찾고 있을 때 소목공이 나타나서 대신들과 상의한 후 잠정적으로 천자를 대신할 권한을 직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 때가 기원전 841년이었는데 소목공은 왕이 없는 상태에서 주(周)나라의 정공(定公) 및 여러 재상들과 공동으로 화합해서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중국 역사는 이 시기를 공화(共和) 또는 주소공화(周召共和)라 부른다. 핵심이 되었던 두 사람 중 정공은 주나라 왕실의 일원으로 상징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소목공은 개혁세력의 대표로 인식되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었지만 혼란에 빠진 국가의 안정과 사태수습을 위해 언제나 협의하면서 정사를 이끌어 나갔다.
사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죽서기년(竹書紀年·하은주부터 위나라 양왕까지의 편년체 중국 역사서)과 여씨춘추(呂氏春秋·진나라 재상 여불위가 편찬한 역사서)에는 이 내용이 약간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공(共)나라의 제후였던 화(和)가 천자를 대신해서 정치를 하였으므로 공화라는 말이 생겼다’라고 하고 있기도 하다.
◆ 최고 권력자 없었지만 협치로 정국 수습
아무튼 이 시기 원톱 시스템으로서의 천자는 사라지고 여러 세력들이 힘을 합하여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서로 견제하면서 국가를 함께 경영해 나갔다. 이 시기는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 828년까지 14년 동안 지속되다가 려왕이 유폐지에서 죽자 려왕의 아들인 정(靜)이 선왕(宣王)으로 즉위하면서 막을 내리고 주나라의 왕실은 겨우 회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주나라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후였고, 그 이후 주나라의 국세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양에서 공화제(republic)가 도입된 뒤 일본의 란가쿠(蘭學)시대에 이 단어의 번역에 골몰하던 일본학자들은 중국고전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내어 이를 ‘공화제’라고 번역해서 지금까지 일본은 물론 동아시아 전역에서 쓰는 단어가 됐다. ,republic은 개인적인 것에 대비해 공공의 사물이라는 res publica에서 나온 말이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 왕의 무능, 측근의 국정농간 3000년 전의 역사 데자뷰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말은 자주 하고 있지만 지금부터 무려 3000년 전 중국에서 있었던 일과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은 단순히 데자뷰(deja vu)라는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 유사한 점이 많다. 왕의 정치적 무능과 외부로부터 굴러들어온 1인에 의한 국정농간, 그리고 소통의 부재와 직언을 할 수 있는 신하의 부재 등이 그렇다. 데자뷰란 최초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이미 보았다’는 의미다. 영어로는 ‘already seen’에 해당한다.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이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어떤 식으로 결정될지는 결론이 나야 알 수 있다. 하지만 당분간 우리는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된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
◆ 협치, 공화 잘 하면 ‘최고지도자 부재 시기’ 더 평가할 수도
이럴 때일수록 기원전 9세기 주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면서, 서로가 힘을 합쳐(共) 어우러지는(和) 결론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뒤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얘기하면서 공화(共和)의 의미를 다시 되새길 수 있길 기대한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보다 역사는 협치를 더 가치 있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치권이 깨닫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