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일의 중국 비즈니스 오해와 진실

중국 역사상 최대 부패, 국정농단 스캔들 화신(和珅)

유일(劉一) 여의주식회사 상임고문 |입력 2016-10-27 00:10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부정축재를 했던 화신, 그의 부정축재 규모는 당시 청나라의 12년치 재정수입에 해당했다.
검증받지 않은 한 민간인의 국정개입이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온 국민이 충격에 휩싸였지만 사실 과거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런 일은 종종 있어왔다. 특히 중국의 역사를 보면 한 사람이 국정을 농단한 경우가 적지 않다.
진시황의 뒤를 이은 2세 황제 호해를 에워싸고 권세를 누렸던 환관 조고(趙高), 후한 말기 전권을 차지하고 온갖 탐욕을 다 부렸던 동탁(董卓)은 물론이고, 서진의 황제 무제의 외삼촌으로 라이벌 석숭(石崇)과 함께 재산 과시 경쟁을 벌였던 왕개(王愷) 등 그 사례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국운을 쇠퇴시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고 중국 역사상 가장 부패의 규모가 컸던 사람은 청나라 말기 화신(和珅·1750-1799)이다.

◆ 중국 역사상 부정축재를 가장 크게 한 화신(和珅)

명나라의 뒤를 이어 전 중국을 통일하고 지금의 몽골 지역까지 통치하면서 중국 역사 상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던 청나라의 전성기는 강희(康熙)제-옹정(雍正)제-건륭(乾隆)제로 이어지는 3명의 황제 치세(治世)기간이었다. 이 시기 청나라는 내치가 안정되고 외부적으로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넘보는 이가 없었고, 재정도 튼튼해서 번영이 영원할 것 같았다.
영국왕 조지 3세가 보낸 특사인 조지 맥카트니 (1737-1806)가 건륭제(1711~1799, 재위 기간: 1735~1795)를 알현해서 왕의 친서를 전달했지만 건륭제는 ‘우리나라는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해서 영국과의 통상이 필요 없다’ 라고 잘라 말할 만큼 청나라는 자신감으로 넘쳐 있었다.
건륭제는 88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았고, 이 중 공식적인 재위기간만 60년에 이르렀는데, 이 시기 중국의 GDP는 전 세계 GDP의 1/3을 차지할 정도였지만 실제로는 안으로 곪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중병의 근원에는 和珅 (화신) 이라는 총신이 있었다.
중국 최대의 부패사범 화신과 사돈을 맺었던 건륭제. 그는 죽는 그 날까지도 화신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 전쟁 나가는 장수에게도 돈 받고 임명장 수여

1781년 3월 깐수(甘肅) 성의 허저우(河州 : 지금의 칭하이 성) 순화(循化) 현에서 관원들의 횡포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지방관원들을 죽이고 란저우(蘭州)를 수도로 정했다. 이 민란은 이후 인근의 쓰촨(四川) 성 일대로 번져 조정에서는 큰 위협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건륭제는 화신에게 군사를 일으켜 즉각 출정하도록 명령해 모든 준비가 되었지만 화신은 웬일인지 출정일을 계속 늦추기만 했다. 다급해진 장수 아계(阿桂)가 ‘왜 출정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지만 화신은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화신은 며칠 후 자신에게 뇌물을 바친 장군이 생긴 다음에야 그를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움직이도록 했다. 나라의 위태로움보다 자신의 치부가 더 중요했던 것.

◆ 황제 진상품 중간서 가로채, 백주대낮 부녀자 강간도

화신은 국가경제에도 직접 관여했다. 세수를 확보해서 국가재정을 튼튼하게 하면서 문화사업에 힘을 기울인다는 명분 하에 땔감, 쌀, 소금, 술 등의 유통과 세금징수를 일원화하면서 자신에게 뇌물을 바친 상인들에게 독점권을 주기도 했다.
건륭제의 딸과 자신의 아들이 결혼하면서 화신은 황실의 사돈이 되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지위에 올랐고, 황제에게 가는 모든 문서는 화신을 거쳐서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전혀 전달되지 못하도록 했다. 마지막에는 황제에게 가는 모든 진상품도 화신의 손을 거쳐 전달되었는데, 그 중 진귀한 것은 직접 가로채기까지 했다. 건륭제는 죽는 순간까지 화신의 실체를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이 화신이 두려워 직언을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설령 고발하더라도 이미 황제의 눈과 귀는 화신이 장악하고 있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화신은 이를 이용해 말을 타고 궁궐에 들어가는가 하면 백주대낮에도 반반한 여자라면 납치하여 강탈하는 등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다.
화신을 잡아들이고 처형한 뒤 그 재산을 몰수한 가경제. 그는 건륭제이 아들이다.
◆ 부정축재 9억 냥, 당시 12년 치 세수

화신의 종말은 생각지도 않게 찾아왔다. 건륭제가 노년이 되어 아들인 가경제(嘉慶·1760~1820, 재위 기간: 1796~1820)에게 제위를 물려주자 그동안 입 밖으로 못 내놓던 얘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태자 시절부터 화신의 문제를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가경제는 즉위 3년 후 아버지인 건륭제가 죽자마자 전광석화 같이 화신을 체포하고 재산을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 화신의 재산은 무려 9억 냥에 이르렀다. 당시 청나라의 1년 세수 총액이 8천 만 냥에 불과했으므로 12년분의 세수를 축재한 셈이다.
1799년 2월 22일 가경제는 화신의 죄를 20개 항목으로 규정하면서 자결을 명했다. 이미 대세가 기운 것을 눈치 챈 화신 또한 이에 순응하여 비단에 목을 매어 자진했다. 그가 죽은 뒤 화신의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로 남았다. 가경제는 이 재산을 국고가 아니라 황실에 귀속하게 하여 자신은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나갔지만 화신의 탐욕과 지방재정의 황폐화로 인한 민생의 파탄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화신이 죽으니 가경이 배불리 먹었다(和珅跌倒,嘉慶吃飽)’ 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곧이어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을 통해 서구열강들로 하여금 청나라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라’라고 인식하게 하고 침략의 말고삐를 당기는 계기가 된 것이다.
건륭제 통치 당시 중국에 와서 통상을 요구한 영국의 특사 조지 매카트니. 하지만 중국은 "우리는 부족한 물품이 없다"며 교역을 불허했다. 이는 결국 청나라의 멸망을 재촉했다.
◆ 지금이라도 제대로 수습하면 재도약 기회

대통령의 국정에 깊숙이 개입한 비선실세의 이름이 수면에 떠오르면서 연일 신문과 방송이 요란하다. 성난 민심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 하다. 지금의 비선실세가 벌인 일들을 듣고 있노라면 금전적 부정의 규모는 화신보다 작을지 몰라도 국정농단의 피해는 결코 화신보다 낫지 않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든 것을 명백히 밝히고 건설적인 국가발전 방향에 대한 합의를 이루는 일이다. 화신의 재산을 황실에 귀속하지 않고 국고에 충당했더라면 최소한 10년 이상 재정이 안정되고 청나라의 진로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태평천국의 난 당시 영국금융자본에게서 돈을 빌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국가적인 위기는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망국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지만 재도약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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