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일의 중국 비즈니스 오해와 진실

불멸의 작품, 광기의 제품 - 문화계 정치오염의 후폭풍

유일(劉一) 여의주식회사 상임고문 |입력 2016-11-01 14:11
중국 근현대 문학의 최고 거장 루쉰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전 중국을 강타하면서 류샤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 등 이른바 주자파(走資派) 세력들이 숙청되고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조차도 힘을 잃었을 때 나타나서 국정을 농단한 세력이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인 장칭(江靑)을 중심으로 야오원위안(姚文元), 쟝춘차오(張春橋), 왕홍원(王洪文) 등 ‘중국의 사인방(四人幇)’이다. 이들은 합법적인 정부와 별도의 법에도 없는 중앙문혁소조라는 조직을 만들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의 행동에 이론적인 뒷받침을 아끼지 않은 인물은 캉성(康生)이었다.

◆ 문화대혁명 광기를 일으킨 중국 사인방(四人幇)

야오원위안은 1931년 저장(浙江) 성 샤오싱(紹興) 출신으로 부친 야오펑쯔(姚蓬子) 저명한 저술가이자 번역가 및 예술평론가로 활동하는 등 지식인집안의 출신이다. 그는 상하이(上海)에서 문학평론으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는데,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하는 평론가에 불과했다. 1949년 그는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중국작가협회의 선전실에서 일했지만 별 영향력은 없는 실무자에 불과했다.

◆ 야오위안의 ‘해서파관을 논함’이 문화대혁명 소용돌이 신호탄

1955년 그는 작가 후펑(胡風)의 작품인 ‘분청시비(分清是非) 획청계한(劃清界限)’을 사회주의 미학적 관점에서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출세의 기회를 마련한다. 그 자신이 시인이기도 했던 마오쩌둥은 문화와 예술에 대한 그의 관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1965년 야오는 마오쩌둥의 지침 아래 상하이(上海)의 원후이(文匯)보에 ‘새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评新编历史剧, 海瑞罢官)’이라는 평론을 발표했다. 이 평론은 10년간 전 중국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후에도 그는 문혁이데올로기에 입각한 평론들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작가들의 작품을 비판하고, 비판받은 작가들은 어김없이 홍위병의 손에 치욕과 폭력을 당해야 했다.
문혁 시기 그의 직위는 계속 올라 해방일보의 편집위원에서 중국 공산당 상하이 시 위원회의 선전부장, 상하이시 위원회 제2서기를 거쳐, 끝내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에까지 올라 권세를 누렸다.

◆ 야오위안, 뉘우쳤지만 때는 늦어….

마오쩌둥이 숨지고 장례식을 치른 후 얼마 되지 않아 전광석화처럼 진행된 사인방의 체포과정에서 그는 체포되었다. 사인방의 다른 멤버들이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강변한 것과는 달리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1996년 10월 출옥하여 항저우(杭州)와 상하이에 은거했다. 2005년 12월 23일 그는 당뇨병으로 죽었는데, 1998년 회고록 출간을 희망했으나 공산당 선전국의 검열 과정에서 불허되었다.

◆ 중국 근·현대 문학의 최고 거장 루쉰(魯迅)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으로는 중국 최고의 문인이었던 루쉰(魯迅)을 들 수 있다. 루쉰은 근현대 중국 문학의 최고봉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일본의 문예평론가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는 “루쉰은 소설은 너무 어려워서 재미가 없다”라면서도 “대략 18년간 루쉰은 중국 문단의 중심적 위치에서 한 번도 물러난 적이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1881년 9월 25일 야오원위안과 같은 고향인 저장(浙江) 성 샤오싱(紹興)에서 태어난 루쉰의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이다. 당초 상당히 이름 있는 사대부집안의 출신이지만 어릴 때 할아버지가 뇌물사건으로 투옥되고 아버지가 병사하면서 집안이 몰락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 루쉰 문학청년, 가난 때문에 군사학교 입학

문학을 사랑한 루쉰이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학비부담이 없는 군사학교에 입학했던 루쉰은 졸업 후 1902년에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유학을 떠났고, 1904년 센다이(仙臺)의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1909년 일본에서 귀국한 루쉰은 고등학교와 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창작을 위한 열정 하나만으로 자신의 재능을 불태웠다.

◆ 신해혁명 뒤 교육부 근무, 상급자 의견 안 맞자 홀연히 사표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된 1912년 루쉰은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교육부에 자리를 마련하여 이후 교육부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신념과 다른 문학가들에 대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타협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논쟁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베이징(北京)에서의 학생소요에 따라 학생들을 퇴학시키는 일이 벌어지자 교육부에 사표를 제출하고 붓을 이용한 투쟁전선에 나서기도 했다.

◆ “대가 없는 돈은 자유로운 사고에 장애”-정부 작품 지원 거절

교육부를 사직했지만 교육부장(교육부장관) 이었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는 루쉰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돈 걱정 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급여를 계속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루쉰은 거절했다. 루쉰은 ‘대가 없이 받는 돈은 자유로운 사고와 독립된 인격형성에 장애가 된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의 이름에 비해 남긴 작품의 수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가 1921년부터 연재한 그의 대표작 ‘아큐정전(阿Q正傳)’은 세계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품이다. 루쉰의 사후 20년이 지난 1957년 누군가 마오쩌둥에게 ‘만약 루쉰이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물었더니 마오쩌둥은 ‘감옥에 갇혀 글을 쓰고 있거나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을 만큼 그의 예술에 대한 위치에 확고했다.

◆ 작금의 문화계 비선실세, 문화예술 전반 악영향 심대

문화콘텐츠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작금의 나라 상황을 보면 참담함이 앞선다. 문화예술인은 유사 이래 언제나 가난한 가운데 창작열을 불태워 왔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는 문화의 발전을 위해 지원을 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의 문화예술지원을 미끼로 자신의 사복을 채우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국정에 자격도 없이 개입하는 행위는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한다.

◆ ‘아큐정전(阿Q正傳)’과 ‘평해서파관(評海瑞罢官)

오늘날 루쉰의 작품은 세계적으로 시대를 건너뛰어 읽혀지고 있지만 야오원위안의 평론은 정치적으로 제목만 언급될 뿐 어느 누구도 문학적 시각에서 읽지 않는다. 잠시 ‘문화계의 황태자, 문화계의 비선실세’로 불리며 대한민국의 문화계에 흑풍(黑風)을 일으킨 어느 광고감독의 작품도 이렇게 잊혀질 것 같다.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루쉰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덩샤오핑이 집권한 뒤 체포된 사인방 중 한 명인 야오원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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