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문명 교류는 어느 시점에 접어들면서 ‘일방통행’으로 변했다. 산업혁명에 성공한 유럽, 그리고 영미 문명의 세례가 동양사회를 향해 밀려오던 무렵이다. 그 즈음의 유럽과 영미는 구체적인 몸집을 드러냈다. 제국주의라는 그림자를 등에 업고서 말이다.
역류(逆流)라고까지 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비교적 우월했던 중국 중심의 동양 문명은 이 무렵에 나름대로 서진(西進)했던 기세를 완전히 멈추고 거의 일방적으로 유럽과 영미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다.
문물과 제도는 이름을 통해 우선 몸집을 드러낸다. 어떤 이름으로 어떤 문물과 제도 또는 물건을 지칭해서 그를 이해하느냐는 따라서 동양의 일반 지식계, 나아가 일반인에게도 모두 중요한 사안이었다. 중국어도 그 점에서는 결코 예외일 수 없다.
德律風(덕률풍)이라는 낯선 한자 단어 등은 다 그런 예다. 이 단어는 Telephone, 즉 전화의 음역이다. 비교적 듣기에도, 보기에도 좋은 음역이다. 온화하며 도저한 기운인 ‘덕(德)’의 ‘율조(律)’가 ‘바람(風)’을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 중국 뉴스를 들여다보는 한국인에게 단연 눈에 띄는 단어가 바로 薩德(살덕)이다. 미국이 추진하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DD)의 중국어 음역이다. 음역이라는 것이 원래 발음에 가까우면 통용이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하는 법이다. 따라서 그 초반부터 정답은 없지만, 대개 미디어의 전파 경로와 형식을 따라 퍼지면서 자리를 잡는다.
薩德 또한 마찬가지다. 누가 언제 어떻게 왜 이런 음역을 채택했는지는 잡아내기 힘들다. 薩德는 글자 그대로는 우선 좋아 보인다. 앞의 글자 薩은 과거 동양에서 자주 썼다. 외래 종교인 불교의 깨달음에 다가선 이, 보살(菩薩)을 표기하면서다. 게다가 도덕의 德(덕)을 붙였으니 얼핏 보면 의미가 그럴 듯하다.
그러나 속내를 알고 보면 간단치 않다. 가학적(加虐的)인 취미의 성벽(性癖)으로 아주 이름이 드높았던 프랑스의 마르키 드 사드 후작의 이름과 같아서다. 중국인들은 가학적인 성욕, 즉 사디즘(sadism)의 큰 줄기를 형성한 사드 후작의 이름을 薩德로 음역한 역사가 있다.
따라서 미국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명칭을 일부러 薩德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으로서는 자신의 전략적 판도를 위협하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체계에 사드 후작의 이름을 붙이면서 그 가학적인 취미를 비꼬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중국식의 반응이다.
우리로서는 생존의 갈림길일 수도 있는 북한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체계였으니 그곳에 설령 묻어 있을지 모를 중국의 의도에는 크게 의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薩德라는 음역에는 우리의 시야와는 다른 중국의 전략적 이해가 담겨 있을 테다.
외래 문물과 제도를 음역해 온 중국의 역사는 짧지 않다. 저 먼 곳에 있는 석류(石榴), 포도(葡萄), 시금치를 뜻하는 波菜(파채) 등은 중국의 실정과 발음 등에 맞는 의역(意譯)의 소산이다. 직접적인 음역은 18, 19세기에 집중적으로 벌어진다. 밀려오는 서양 제국의 거대한 힘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접점을 이룬 곳은 광둥(廣東)이다. 그곳에는 영국의 제국적 역량이 가장 먼저 밀려들었다. 당시의 광둥 사람들은 제 발음인 광동어에 맞는 음역을 했다. 대표적인 음역이 的士(적사)다. 영국에 굴러다니던 taxi의 음역이다. 的士를 표준어인 보통화 발음으로 읽으면 ‘디스’다. 그러나 광둥어 발음으로 읽으면 ‘딕시’다. 원래의 taxi 발음에 훨씬 가깝다. 맥도날드의 음역인 麥當勞(맥당로)도 마찬가지다. 표준어로 ‘마이당라오’로 읽을 때보다 광둥어로 발음할 때 원음에 훨씬 가깝다. 그러나 먼저 이를 받아들인 광둥어가 우세다. 그곳에 먼저 정착한 한자 음역어가 이제는 훨씬 더 많이 쓰인다.
지역적인 구별 없이 많이 쓰였던 西門汀(cement), 德谟克拉西(democracy),賽因斯(science)도 있다. 특히 민주(民主)를 뜻하는 德谟克拉西와 과학을 가리키는 賽因斯는 앞 글자만을 그대로 따와 德先生(덕 선생)과 賽先生(새 선생)으로도 적었다. 각각 ‘미스터 민주주의’와 ‘미스터 과학’이라는 뜻으로 유행해 서구 문명과 문물, 제도를 향한 중국인들의 선망과 기대를 담은 적도 있다.
이제는 원음에 가깝되 미감(美感)도 어느 정도 충족시키는 음역이 유행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인 코카콜라다. 이 상품에 관한 중국의 음역은 잘 알려져 있다. 可口可樂(가구가락)이다. 중국어 발음으로 읽을 때는 ‘커커우커러’이니 음역이 제법 충실하다. 그러면서도 ‘입(口)에 맞고(可) 즐겁기(可樂)조차 하다’는 새김까지 얹으니 최고의 음역으로 꼽힌다.
그에 뒤질까 펩시콜라도 명품 음역을 내놨다. 바로 百事可樂(백사가락)이다. 중국어로 읽으면 ‘바이스커러’인 셈이니 음역이 전혀 엉뚱하지 않다. 아울러 ‘모든(百) 일(事)이 즐겁다(可樂)’고 하니 이 역시 어찌 즐겁지 않을 텐가.
조립 가구로 유명한 유럽의 IKEA도 마찬가지다. 중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자신의 브랜드를 宜家(의가)로 옮겼다. ‘이자’라는 표준어 발음이 조금은 궁색하지만, 광둥어로 읽었을 때는 원음에 가깝다. 게다가 집(家)에 잘 어울린다(宜)는 뜻을 담고 있으니 가구 제조회사의 음역 센스치고는 매우 수준급이다.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업체인 NIKE는 耐克(내극)으로 옮겼다. 발음도 원음에 매우 근사치를 보인다. 새김 또한 ‘참아서 이겨내다’이니, 아주 그럴 듯한 음역으로 꼽을 수 있다. 침대를 판매하는 Simmons의 음역도 눈물겹다. 한자로 席夢思(석몽사)다. 자리(席)에서 꿈을 꾸며(夢), 생각에 잠긴다(思)는 풀이다. 잠자리에 드는 사람에게는 몽상과 사색, 그리고 고요함을 연상케 하는 명품 음역이다.
글자 하나에 상당한 함의를 지닌 한자(漢字)가 그 기초를 이루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때로는 제한적인 발음 요소로 인해 상당히 어색한 음역도 생기지만, 그로 인해 번지는 새김의 확산은 제법 대단하다. 한자가 지닌 표의적인 기능, 그 깊이에 덧붙여지는 상상의 영역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