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홍인표의 권부비화

13억 중국인의 가슴에 별이 된 첸쉐썬 3

홍인표(洪仁杓) 고려대 연구교수|입력 2016-11-10 06:11
중국 우주개발의 대부 첸쉐썬(錢學森·1911~2009)
첸쉐썬(錢學森)은 만년의 모습을 보면 온화하고 겸손한 인상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 귀국 직후만 해도 이른바 돌직구를 날렸다. 인정사정 보지 않았다. 다이루웨이(戴汝爲, 1932~)는 베이징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중국과학원 역학연구소로 발령받았다. 원장 첸쉐썬의 문하생이 된 것이다. 하루는 연구소 도서관에 갔다가 때마침 책을 보고 있던 첸쉐썬과 만났다. 잘됐다 싶어 “어떤 책을 읽어야 연구하는 데 참고가 될까요?”라고 공손하게 물었다. 그러자 첸쉐썬은 연구하는 사람은 독립적인 사고를 가지고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거야. 나한테 묻지 마. 이렇게 잘라 말했다. 얼마나 말투가 매정했던지 다이루웨이는 무안해서 얼굴이 벌겋게 되고 말았다. 한번은 연구소에서 학술적인 견해를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의 발표를 듣고는 첸쉐썬 원장은 매정하게 말았다. “자네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네. 말에 논리가 없어. 한마디로 말하면 헛소리란 말이야.” 다이루웨이는 당시 연구소에서 첸 원장에게 야단을 맞지 않은 연구원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다이루는 첸쉐썬 원장이 미국에서 펴냈던 유명한 저서 엔지니어링 사이버네틱스를 중국어로 번역해 책으로 냈고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1991년 중국 과학자들의 최고 영예인 중국과학원 원사(우리의 학술원 회원과 같은 영예)가 됐다. 하지만 아직도 첸쉐썬 원장에게 당했던 질책을 잊지 못하고 있다.

◆ “아니 자네는 이런 것도 모르나?” - 학문 앞에서 매서웠던 첸쉐썬

첸쉐썬의 연구소 원장 초대 비서였던 장커원(張可文)은 베이징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역학연구소 원장로 발령받았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베이징대학의 수학과 교수가 첸쉐썬 원장에게 뭔가를 물어보려고 왔다.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의자가 있었지만 췐쉐썬 원장은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수학과 교수는 원장 책상 앞에 서서 10분 이상을 얘기를 주고받았다. 마침내 첸 원장이 한마디 했다. 아니 자네는 이런 것도 모르나. 교수는 얼굴이 벌개져서 어쩔 줄 모른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첸쉐썬에게 큰 절을 하고는 사라졌다. 장커원 비서는 정확한 대화 내용은 모르지만 이런 것도 모르냐는 원장의 호통은 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그녀는 나중에 한가한 틈을 타 첸쉐썬 원장에게 말했다. 원장님. 연구소에서 모두들 원장님을 무섭다고 해요. 수준이 낮더라도 좀 살갑게 대해주세요. 다들 원장님께 조금이라도 배우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자존심도 있고요. 당시 첸쉐썬 원장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 날 이후 원장이 더 이상 매정하게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훗날 첸쉐썬은 첫 비서 장원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장원커 비서는 그 말을 듣고는 원장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의미를 잘 몰랐다. 췐쉐썬 아들 첸융강(錢永剛)은 사람마다 자존심이 있다는 장 비서 말이 부친에게 크게 일깨워주는 바가 있었다고 전했다.


첸쉐썬이 미사일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 문화대혁명 앞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1957년 중국에서 반(反)우파 투쟁(마오쩌둥이 자신에게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를 탄압하기 위해 중국 내 우파를 제거한다는 명목에서 전개한 정치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첸쉐썬이 귀국한 이후 처음으로 겪는 정치운동이었다. 그는 이런 운동 경험이 전무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일단은 운동에 참가하려면 대자보를 붙여야 했다. 당시 역학연구소는 원장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인 사람은 없었다. 원장이 천신만고 끝에 귀국했고 모두들 이런 그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자보가 전혀 없어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장커원 비서는 첸쉐썬 웬장과 상의를 해서 서로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이기로 했다. 장 비서는 원장이 너무나 엄숙하고 민중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모자라다, 이런 내용의 대자보를 붙였고, 첸쉐썬 원장은 비서가 너무나 어린 아이 같다는 대자보를 붙였다.
 1965년 첸쉐썬은 인공위성 연구제작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중국 최초 인공위성이어서 정치적 의미가 큰 사업이었다. 중국 정부가 요구한 것은 한 번에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공위성이 무사히 지구궤도에 올라간 다음에는 지상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신호라는 게 일반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위성 설계자들이 고안한 아이디어가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혁명 가극 둥팡훙(東方紅) 시작 부분 8소절을 반복해서 지상으로 전송하면 어떠냐는 것이었다. 첸쉐썬은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상부에 냈다. 중앙은 이런 계획을 승인했고 정치임무라고 지시했다. 중국의 정치임무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이뤄야 하는 지상명령이다. 위성이 가극 둥팡훙을 방송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하늘에 올라간 다음에 노래가 이상하게 나온다거나 잡음이라도 생기면 당시는 문화혁명 시기라서 목숨마저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둥팡훙 노래를 정확하고 듣기 좋게 하기 위해 첸쉐썬은 여러 차례 위성 설계자들의 보고를 듣고 설비를 챙겼다. 둥방훙 노래를 전송하는 것에 지장을 주는 것이라면 포기하게 만들었다. 1970년 4월25일 중국은 첫 인공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했고 다행히 둥팡훙 노래도 잡음 없이 잘 들렸다.

◆ 마오쩌둥 충성심 보이려 첫 인공위성에서 찬양가 둥팡훙(東方紅) 흘러나오게 해

1958년 중국은 인공위성 연구를 시작하기 전이었지만 대약진 운동과 소련 위성 발사 성공으로 생산위성이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농촌마다 생산기록을 잇따라 경신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1958년 6월 8일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허난 성의 한 농촌에서 200평당 밀 생산량이 2105근(1근은 500그램)을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것은 첫 생산위성을 발사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평가했다. 6월 12일 새로운 기록이 나타났다. 200평당 3520근의 밀을 생산했다는 것이다. 이런 생산량은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소식이 전해진지 4일 만에 첸쉐썬은 공청단 기관지 중국청년보에 기고문을 실어 이런 생산위성이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벼나 밀, 보리가 햇빛을 이용하고 공기에 있는 이산화탄소와 물을 합쳐 영양분을 만들면 식량 생산은 엄청나게 늘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1958년 4월 29일 첸쉐썬은 인민일보에 집단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역시 생산량을 크게 늘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200평에서 1만근의 밀을 생산하는 것이 환상임은 금세 현실로 드러났다. 1959년 봄이 되자 대약진 운동의 기세는 한결 사그러들었다. 그럼에도 첸쉐썬은 ‘아는 것이 힘이다’ 잡지(1959년 제5권)에 높은 식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이를테면 연간 200평의 땅에 비치는 햇빛은 94만근의 탄수화합물을 생산한다. 작물이 햇빛을 100% 완벽하게 이용한다면 연간 94만근의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이었다. 문제는 현실성 여부와 관계없이 첸쉐썬이라는 무게감 덕분에 그의 논문이 중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렀다는 점이다. 이후 대약진운동의 후유증을 보면 첸쉐썬이 당시 발표한 주장의 잘못에 대해 나중에라도 공개 사과를 했어야 했다. 이런 의견도 만만찮다.


인민일보가 원자폭탄 실험 성공을 호외로 전하고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 상급자 억지 비판도


 1975년 복권에 성공했던 덩샤오핑(鄧小平) 격하 운동이 다시 벌어졌다. 그해 연초 국방과학위원회 주임을 새로 맡은 장아이핑(張愛萍. 1910~2003) 장군은 덩샤오핑 추종 세력으로 몰렸다. 그래서 장아이핑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당시 첸쉐썬은 국방과학위 부주임이었다. 그는 비판대회에서 상급자인 장아이핑 주임과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대자보를 붙였다. 장아이핑을 대국 배타주의에 물들었다고 비판했다. 구체적으로 그가 1960년대 장아이핑 장군을 수행해서 미사일 발사장에 갔을 때 일어난 일을 고발했다. 장아이핑 장군이 지도를 가리키면서 몽골은 과거 중국의 땅이었다.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첸쉐썬 대자보가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첸쉐썬이 비판대회에서 했던 발언은 장아이핑에게는 엄청난 상처를 주었다. 장아이핑 장군 아들 장성(張勝)은 2007년 나온 아버지 전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사실 부친은 다른 사람 비판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평생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장아아핑은 듣고 싶은 거만 들으면 돼. 무슨 대수라고. 늘 이런 식으로 치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자인 첸쉐썬 발언은 그를 너무나 당혹스럽게 했다. 첸쉐썬은 비판대회에서 장아이핑은 어떤 사람인가. 내가 보기에 악마다. 나보고 손짓하면 악마가 부르는 것 같아 몸서리가 처진다. 이렇게 말했다. 결국 장아이핑은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갑자기 도져 병원에 입원했다. 훗날 운명의 장난처럼 장아이핑은 덩샤오핑 복권 이후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비롯한 방위산업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 자신을 추방한 미국, 숱한 초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아

개혁개방 이후 미국은 여러 번 첸쉐썬에게 미국 방문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 미국은 그의 청년시절을 보낸 제2의 고향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다시 가기를 원한다고 여겼지만 그는 실제로 다시는 미국에 가지 않았다. 비서 장커원은 첸쉐썬 원장이 유명한 과학자라서 자존심이 엄청 강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았고 이것에 대해 엄청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1950년 매카시즘이 성행하면서 반공의 물결 아래 그는 미국에서 강제 추방을 당했다. 추방을 당하기 전에는 연구도 하지 못한 채 5년 동안 연금 생활도 했다. 1980년대 후야오방(胡耀邦) 당시 공산당 총서기는 첸쉐썬에게 이렇게 권했다. 박사님 국제적으로 영향력도 크시니 미국이 초청하시니 초청을 받으시죠. 나가서 한번 둘러보세요. 박사님이 나가시는 건 다른 사람과 다릅니다. 중국과 외국이 과학기술 교류를 추진하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겁니다. 오늘날 세계도 변하고 중국도 변하고 미국도 변하고 있습니다. 몇 십 년 전에 일어난 일 이제 다 잊으시고요. 너무 마음에 두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첸쉐썬은 이렇게 대답했다. 미국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잘못했다고 시인을 하지 않는 마당에 제가 미국에 가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이에 대해 후야오방 총서기는 제 말은 권유를 하는 것이지 반드시 가셔야 한다는 명령은 아닙니다. 가시기 불편하시다면 박사님 의견을 존중하겠습니다.

◆ 음악애호가에 아마추어 사진작가, 귀국한 뒤 돈 없어 못해

나중에 미국 정부는 중국 측에 이런 제안을 했다. 과거 미국 정부가 첸쉐썬에 대했던 것은 잘못이었다. 공정하지 못했다. 인정한다. 첸쉐썬이 미국에 온다면 미국 과학원 원사와 미국 공학원 원사 칭호를 드리겠다. 첸쉐썬은 나중에 이 일을 알고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얼마나 교활한지 잘 보여주는 거다. 나는 걸려들지 않을 거다. 나는 미국을 떠났을 당시 강제추방을 당했다. 미국 법률 규정에 따르면 나는 다시 미국에 갈 수가 없다. 미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명예회복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미국 땅을 다시 밟지 않을 것이다.
1989년 국제 이공연구소는 첸쉐썬에게 노벨상과 버금가는 명성을 가진 로크웰 주니어 과학상을 수여했다. 이것은 현대 이공계 최고의 영예였다. 첸쉐썬은 당시 중국 과학자로는 첫 수상자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 뉴욕에 가서 상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위해 수상을 한 사람은 당시 주미 중국 대사다. 첸쉐썬은 취미가 다양했다. 부인 장잉(張英)과 마찬가지로 음악 애호가였다. 서양 음악사에 정통했다. 트렘펫도 잘 불었다. 어렸을 때는 꽃과 새 그림을 잘 그렸다. 미국 유학시절에는 촬영이 취미였다. 그는 요즘 말로 셀카로 자신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에 귀국한 다음에는 사진 취미를 포기했다. 왜냐. 이런 일이 있었다. 귀국 전 부부는 중국 생활형편이나 연구조건이 미국과 천양지차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고생을 해야겠다. 이런 마음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첸쉐썬은 1급 교수로 월급이 300위안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수입이 많았다. 귀국한 직후 첸쉐썬 부부는 300 위안으로 얼마나 많은 물건을 살지 몰랐다. 첸쉐썬은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아끼던 사진기를 갖고 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사진을 현상했더니 월급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때서야 미국처럼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없구나. 아껴야겠구나. 이로부터 첸쉐썬은 사진기를 상자에 집어넣었다. 이후 그는 다시 사진을 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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