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미사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첸쉐썬
1956년 1월, 중국 국무원은 12년 과학기술발전계획(1956년~1967년)을 짜면서 방위산업 목표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당초 군부는 항공기를 집중 개발해 제공권을 확보하자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첸쉐썬(錢學森)의 견해는 달랐다. 항공기 개발도 중요하지만 당장 급한 것은 미사일 개발이라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미사일은 속도가 마하 20까지 나오는 반면 초음속 비행기는 아무리 빨라도 마하 2에 불과하다. 더구나 전투기를 개발하려면 재료 확보가 어렵다. 재료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꾸준히 경험을 쌓아야 한다. 전투기 재료 문제를 해결하려면 10년 이상 길게는 20년 이상 걸린다. 반면 미사일은 재료 확보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 錢學森, “전투기보다 미사일 개발이 더 시급”
당시 중국의 여러 조건과 사정을 감안하면 미사일을 만드는 것이 전투기를 만드는 것보다 쉽다. 류야러우(劉亞樓) 공군 사령관(1910~1965)은 첸쉐썬 견해를 충분히 반영해 항공기 개발 계획을 포기하고 미사일 개발을 과학기술발전계획에 넣기로 건의했다. 그러면 미사일 개발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장 좋은 방법은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소련의 기술 지원을 받는 것이었다. 중국은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고 소련 최고 지도자 흐루시초프는 흔쾌히 동의했다. 당시 동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던 반 소련 운동과 국내 정적을 상대하기 위해 마오쩌둥(毛澤東)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국 방위산업을 책임지고 있는 네룽전(聶榮臻) 부총리(원수, 중앙군사위 부주석)를 단장으로 첸쉐썬이 포함된 대규모 대표단이 모스크바에 갔다. 1957년 10월 15일, 네룽전 부총리는 소련과 국방신기술원조협정에 서명했다. 이제 소련의 기술지원으로 중국 유도탄, 원자탄, 수소탄, 인공위성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이 1962년 개발한 중국의 초기 미사일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 소련 도움으로 미사일, 원자탄, 수소탄, 인공위성 개발 시작
소련은 2차대전 당시 독일이 만들었던 V-2 로켓을 본뜬 P-2 미사일 2기를 제공했다. 미사일 전문가도 중국에 보냈다. 중국 유학생 50명을 받아 로켓 공부를 소련에서 하도록 했다. 원자탄 모형과 설계도도 제공했다. 네룽전 원수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소련의 도움이 있는 만큼 미사일 개발을 더욱 빨리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자력갱생 원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련 미사일을 본뜬 제품을 만든 다음 우리 스스로 설계해서 국산 미사일을 만들어야 한다. 중국은 소련 미사일 1기는 연구용으로 남겼고 1기는 복제를 위해 해체했다. 1958년 4월 중국 과학자들은 소련 P-2 미사일을 복제한 둥펑(東風) 1호 미사일 제작에 들어갔다. 둥펑이라는 이름은 마오쩌둥의 발언 동풍이 서풍을 압도하다(사회주의 세력이 서방세력을 누른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었다.
◆ 소련과의 밀월 3년 만에 깨져
그러나 소련과의 밀월관계는 불과 3년 만에 깨졌다. 1959년 6월 20일, 소련은 30년 만기로 맺었던 국방신기술원조협정을 파기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중국이 보기에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소련이 중국에 연합함대를 만들자고 제안했으나 마오쩌둥은 거부했다. 또 하나는 소련이 미국과 관계개선을 위해 중국의 이익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반면 서방사회가 보기에는 마오쩌둥의 과대망상에 흐루시초프가 손을 들었다는 것이다.
◆ 1960년 1390여 명의 소련 기술고문 일제히 철수
마오쩌둥은 1957년 핵전쟁을 불사하겠다고 밝혀 소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60년 8월, 중국에 왔던 소련 과학자와 기술 고문 1390여 명이 전원 귀국했다. 343건의 계약, 257건의 두 나라 기술협력 프로젝트는 한순간에 없던 일이 돼버렸다. 이제 중국 미사일 연구자들은 스스로 문제를 풀어야 했다. 둥펑 1호 미사일 시험 발사는 소련 과학자들이 귀국한 상황에서도 1960년 11월 5일 주취안(酒泉) 발사기지에서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둥펑 1호는 길이 17.68m. 무게 20.4t, 액체연료 로켓 엔진을 사용했다. 최대 사거리는 600㎞였다. 그러나 실전 배치를 하지는 않았다.
◆ 미사일 발사 실패 - 네룽전 “실패를 교훈삼아 다시 도전하라”
첸쉐썬은 둥펑 1호 제작은 물론 사거리 1200㎞ 중거리 탄도 미사일 둥펑 2호 독자 개발을 주도했다. 1962년 3월 21일, 둥펑 2호 미사일은 발사 69초 만에 주취안 발사기지 위로 떨어졌다. 야심 차게 개발했던 미사일이 한순간에 폭발해 잿더미가 되는 것을 보고 발사장 현장에 있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은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실패를 했으니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네룽전 원수는 “책임을 묻지 마라. 실패를 교훈삼아 다시 도전하라”고 지시했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과학자들은 미사일의 문제점을 찾아냈다. 우선 유도 제어 시스템을 설계할 때 로켓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진동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엔진과 로켓 구조의 연결이 약했다는 점이다. 설계를 수정한 둥펑 2호 미사일은 17번의 대형 지상 시험, 그리고 105번의 엔진 시험을 거쳤다. 그리고 1964년 6월 29일, 둥펑 2호 미사일은 2번째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나중에 16번의 발사 시험에서 15번 성공했다. 그런 다음 둥펑 2호 미사일은 실전배치를 했다.
◆ 원자탄, 미사일 개발 포기 여부 놓고 치열한 논쟁
둥펑 2호 미사일 시험 발사가 성공한 즈음 중국이 극비리에 추진하던 원자탄 개발도 사실은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첸쉐썬은 핵 전문가는 아니었다. 핵 개발에 적극 참여하기보다는 핵개발 필요성을 적극 강조했다. 그의 이런 충고는 중국 지도부에 큰 격려가 되었다. 1961년 여름.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열린 방위산업회의는 원자탄과 유도탄 개발을 계속할 건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를 놓고 당 간부들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경제가 어려운 만큼 원자탄과 유도탄 개발을 포기하자는 주장이 만만찮았다. 그러나 네룽전 원수는 원자탄 유도탄 개발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첸쉐썬의 지론, 원자탄과 유도탄이 당장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걸 갖고 있어야 전쟁을 막을 수 있고 결과적으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중국 지도부가 지속적인 원자탄, 미사일 개발을 하겠다고 결정한 데 대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 마오쩌둥, “원자탄, 미사일 개발 가속화하라” 지시
1962년 11월 3일, 마오쩌둥 주석은 원자탄 개발을 가속화하겠다는 보고서를 승인하면서 아주 좋다. 이대로 하라. 모두 협조해서 이 일을 잘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주임으로 하는 15인 전문위원회를 만들어 원자탄,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중앙전문위원회에는 7명의 부총리, 7명의 부장(장관)이 들어갔다. 미국과 소련, 프랑스는 중국 원자탄 보유를 막기 위해 1963년 7월 25일, 핵실험 금지조약을 맺었다. 다만 지하핵실험은 허용했다. 중국이 지상에서 핵실험하는 것은 막고 이미 핵을 가진 나라들은 지하에서 핵실험을 하는 것은 무방하다는 의미였다.
이에 대해 중국은 강력하게 반발하는 한편 원자탄 개발을 예정대로 진행했다. 원자탄 설계를 완성했고 농축 우라늄공장도 가동했다. 1964년 1월 중앙전문위원회는 핵실험을 10월 전후해서 하겠다고 당중앙위원회에 보고했다. 그해 6월에는 칭하이(靑海)성 핵연구개발기지에서 모의 핵실험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소련 전문가들은 당초 둔황의 사막에 비행기로 원자탄을 터뜨리는 방식을 추천했지만 중국은 신장위구르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로프 노르(중국식 표기로는 뤄부호수) 기지에 높이 100m 철탑에 매달아 원자탄을 터뜨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중국 인민해방군 각 총부, 신장군구, 란저우군구를 비롯해 중국 과학원, 군사공정학원과 같은 26개 기관, 5058명이 핵실험에 참가했다.
1964년 10월 중국이 첫 원자탄 실험에 성공한 직후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기술자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 “소련 기술자 철수 1959년 6월을 잊지 말자”- 첫 원자탄 번호 596으로 붙여
당시 국제정세는 심상찮았다. 미국이 전투기를 보내 중국 핵실험기지를 폭파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았다. 9월 16일과 17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앙전문위원회를 열어 핵실험을 서두를 건가, 아니면 미룰 건가를 놓고 논의했다. 회의가 끝난 뒤 마오쩌둥에게 보고를 하자 마오는 핵실험이라는 게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게 목적이 있으니 실험을 서두르는 게 좋겠다고 밝혔다. 그래서 첫 핵실험은 10월 15일부터 20일까지 선택하되 현지 기상 조건을 감안해 결정하기로 했다. 핵실험에 사용하는 원자탄 596(이 코드 번호는 1959년 6월 소련이 전문가 철수를 결정했던 때를 절대로 잊지 말자는 뜻으로 붙임)은 칭하이(靑海) 핵 실험기지에서 만들었다. 그 곳에서 신장위구르 로프 노르 기지까지 옮기는 것이 무엇보다 걱정이었다. 미국이 전투기를 보내 폭파를 하거나 스파이를 보내 운반 열차를 폭파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극비리에 원자탄을 옮겼고 1964년 10월 16일 오후 3시, 중국의 첫 핵실험이 성공했다. TNT 20킬로톤의 폭발력을 가졌다. 그날 밤 10시, 중국 중앙라디오가 핵실험 성공 소식을 보도했고 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호외를 찍었다. 맥나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중국이 원자탄 실험을 성공했다고 해도 5년 이상 핵탄두를 옮길 운반 수단은 갖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방 언론도 중국은 탄환(원자탄)은 있지만 총(미사일)은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이미 여러 차례 극비리에 둥펑 2호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발사한 사실을 서방에서는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 미사일에 핵탄두 적재, 타클라마칸 사막에 쏘아 보내 실험
1966년 3월 11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앙전문위원회 제15차 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둥펑2호 미사일에 원자탄 탄두를 장착하도록 결정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미사일 원자탄 동시 실험이었다. 1966년 10월 26일 오전, 주취안 발사기지에서 둥펑 미사일에 원자탄 탄두를 결합했다. 현장에는 네룽전 원수와 첸쉐썬이 참관했다. 10월 27일 오전 8시, 발사 준비를 모두 마쳤다. 발사장 요원들은 모두 10킬로미터 밖 지휘소로 이동했다. 다만 7명의 기술자는 핵탄두 장착 미사일로부터 불과 100미터 떨어진 지하 통제실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7일 동안 버틸 수 있는 비상식량과 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산소마스크를 준비했다. 그러나 만일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핵탄두를 실은 둥펑 미사일은 800㎞를 날아가 정확하게 타클라마칸 사막의 로프 노르 핵 실험장에서 폭발했다. 네룽전 원수는 훗날 당시 핵탄두가 일찍 폭발했거나 발사 직후 미사일이 추락했거나 목표지점을 벗어났더라면 결과는 너무나 끔찍해 상상하기도 겁났다고 회고했다.
마오쩌둥 중국 국가주석이 미사일과 인공위성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첸쉐썬을 만나 격려하고 있다.
◆ 미사일, 핵 개발 성공 뒤 1966년 인공위성 도전, 1970년 4월 성공 발사
미사일 외 중국 우주개발에서 첸쉐썬이 기여한 공로는 중국 첫 번째 인공위성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그는 중국에 귀국하자마자 인공위성 제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58년 1월부터 인공위성 제작을 주도했다. 당시 소련은 1957년 10월4일 최초의 위성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했고, 11월3일 스푸트니크 2호, 이듬해인 1958년 5월15일 스푸트니크 3호 발사에 성공했다. 자연스럽게 인공위성 제작은 중국의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마오쩌둥은 1958년 5월 17일 반드시 인공위성을 발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경험을 쌓은 인력과 방대한 돈이 들어가야 하는 만큼 선뜻 착수하기가 어려웠다. 1965년 만신창이가 된 중국 경제가 그나마 회복 기미에 접어들었다. 1965년 1월, 첸쉐썬은 위성 개발 프로젝트 건의문을 당 중앙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는 중거리 미사일과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면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다며 서둘러 착수하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다. 1966년 5월 첸쉐썬은 중국 첫 번째 인공위성 이름을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혁명 가극 둥팡훙(東方紅)으로 이름 짓고 1970년 창정(長征) 1호 로켓에 실어 발사하기로 결정했다. 인공위성 프로젝트는 첸쉐썬으로서는 모험이었다. 자칫 실패로 돌아가면 그동안 쌓았던 명성에 흠이 가고 마오를 찬양하는 둥팡훙이라는 노래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경우 정치적 위기를 맞을 수 있었다. 1970년 4월24일 오후 9시35분 둥팡훙 1호 위성 발사는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중국은 소련 미국 프랑스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5번째 위성 발사 국가가 되었다. 물론 일본이 중국보다 2개월 앞서 인공위성을 발사한 점이 첸쉐썬으로는 아쉬운 점이었다. 하지만 당시 문화혁명 여파로 인공위성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할 중국 과학원 자오주장(趙九章) 위성설계연구원장(1907~1968)을 비롯해 전문가 20명이 홍위병의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던 점을 감안하면 나름 최선의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