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9일, 중국의 6번째 유인 우주선 선저우(神舟) 11호가 실험용 우주정거장 톈궁(天宮) 2호와 도킹에 성공했다. 올해는 중국이 우주개발에 착수한 지 60년이 되는 해여서 중국 우주항공업계 종사자들에게는 특히 의미가 깊다.
중국 우주개발의 대부 첸쉐썬(錢學森·1911~2009)
◆ 중국 우주개발의 대부 첸쉐썬
중국 우주항공 개발 역사는 세계적인 로켓 전문가 첸쉐썬(錢學森·1911~2009)의 귀국으로 거슬러간다. 첸쉐썬은 미국 MIT와 칼텍에서 항공공학 교수로 있다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5년 동안 미국 당국으로부터 연금을 당했다. 중국 정부가 한국전쟁 당시 붙잡은 미군 포로 조종사 11명을 풀어주는 대가로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그는 1955년 9월 17일 여객선을 타고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해 10월 8일,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에 도착했다. 그는 광저우(廣州)와 상하이(上海)를 다니면서 대학, 연구소, 공장을 두루 둘러보았다.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것은 10월 28일이었다. 11월 1일 밤에는 궈모뤄(郭沫若) 중국과학원 원장이 베이징 호텔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었다. 11월 5일, 천이(陳毅) 부총리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대표해서 그를 접견하고 중국 과학원에서 일을 하도록 지시했다. 당초 중국 정부는 첸쉐썬에게 중국 과학원에 역학연구소를 새로 만들어 소장을 맡길 계획이었다. 그동안 역학연구는 중국과학원 수학연구소 역학연구실이 맡고 있었는데 이것을 확대 개편한 것이다.
그는 11월 22일부터 12월 21일까지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등 동북 3성을 둘러보았다. 당시 중국에서 중공업 분야가 가장 발전한 곳이 동북지방이었다. 중국의 중공업과 고등교육 수준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중국 당국이 그에게 동북지방 출장 기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는 대학과 연구소 탄광 기업 20여 곳을 찾았다. 당초 헤이룽장 성 하얼빈(哈爾濱)에 있는 군사공정학원(국방과기대학의 전신)은 목적지에 들어있지 않았다. 당시 보안규정 때문에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1955년 11월 24일, 하얼빈의 동북열사기념관을 참관했을 때 첸쉐썬이 안내를 맡은 중국과학원 관계자들에게 군사공정학원에 근무하고 있는 제자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과학원 관계자들이 헤이룽장 성 당 위원회에 연락을 했고, 곧 중앙의 허가를 받았다.
당시 베이징에 머물러 있던 군사공정학원 천겅(陳賡·1903~1961) 원장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군용기로 서둘러 하얼빈으로 돌아갔다. 첸쉐썬을 직접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백전노장으로 당시 현역 대장이었다. 11월 25일, 첸쉐썬이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에 도착했다. 이것은 그가 귀국한 이후 처음 중국의 국방 관련 대학 수준을 점검하는 기회였다. 천겅 원장이 직접 공군 공학과, 해군 공학과, 포병 공학과를 안내했다. 일행이 포병 공학과 실험실을 참관했을 때 당시 포병 공학과 부주임이던 런신민(任新民) 교수가 상세하게 현황을 보고했다. 첸쉐썬은 그와 중국 로켓 연구개발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날 밤,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은 환영 만찬을 베풀었다.
1955년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중국 로켓의 아버지' 첸쉐썬, 그는 중국에 돌아오자마자 로켓, 미사일 연구소를 만들고 핵폭탄과 로켓 개발에 일평생을 바쳤다.
◆ “외국인이 만드는 데 우리도 만들 수 있습니다.”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우리도 로켓을 만들 수 있습니까”
천 원장이 첸쉐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안 됩니까. 외국인이 만드는 데 우리도 만들 수 있습니다”
첸쉐썬은 아주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세계적인 학자의 긍정적인 대답은 천겅 원장에게 로켓 개발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그해 12월 런신민 교수를 비롯한 하얼빈 군사공정학원 포병공학과 교수들은 연명으로 국방부에 편지를 보내 중국도 로켓 기술 연구개발에 착수하자고 건의했다. 1956년 1월 천겅 원장 안내로 첸쉐썬은 베이징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문화예술 공연단 연습장에서 고위 군 간부를 대상으로 로켓과 미사일 기술과 관련한 강연을 사흘 동안 했다. 참석자 모두 미사일 개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면서 미사일 열풍이 불었다. 이어 첸쉐썬은 저우언라이 총리 초청을 받아 중국 최고 지도부가 있는 중난하이(中南海)의 회의장인 화이런탕(懷仁堂)에 가서 당과 국가 지도자들에게 로켓 관련 강의를 했다. 중국도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다고 단언한 이후 첸쉐썬은 군 지도부의 귀빈이 되었다. 이것은 그의 앞날에 변화를 가져왔다. 펑더화이(彭德懷) 중앙군사위 부주석 겸 국방부장은 총참모부 장비계획부장 완이(萬毅)를 보내 첸쉐썬과 함께 미사일 개발 문제를 논의하도록 했다. 1956년 1월 20일, 펑더화이 부주석은 중앙군사위 회의를 주재하면서 완이 부장이 제출한 로켓 무기 연구개발과 제조에 관한 보고를 논의했다. 그래서 당 중앙위원회에 미사일 연구개발을 제안하는 보고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동시에 국무원(내각) 제2기계공업부(방위산업 담당 정부 부처) 자오얼루(趙爾陸) 부장(현역 상장)도 국무원에 미사일 연구개발 제조에 대한 보고서를 냈다.
◆ 마오쩌둥, 37번 테이블 배정된 첸쉐썬을 1번 테이블로
1956년 2월 1일 밤, 마오쩌둥(毛澤東)은 국가주석, 중국 공산당 주석(당시는 총서기가 아니라 주석이 당 최고 직위였음), 중앙군사위 주석 신분으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위원들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당시 첸쉐썬은 전국정협 위원으로 당선된 직후여서 이 연회에 초청을 받았다. 원래 초청장에 적힌 좌석은 37번 테이블이었다. 그런데 막상 연회장에 도착하니 안내원이 그를 1번 헤드 테이블로 모셨다. 마오쩌둥 주석 오른쪽이었다. 그날 연회의 최고 주빈으로 모신 것이다. 알고 보니 마오쩌둥은 연회 참석자 명단을 챙기면서 붉은 연필로 37번 테이블에 있던 첸쉐썬 자리를 헤드 테이블로 바꾼 것이다. 이것은 마오쩌둥의 그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두터운 지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미사일 개발의 실무 책임을 누가 맡을 것인지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1956년 2월 17일, 첸쉐썬은 저우언라이 총리 주문을 받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중국 국방 항공 산업 건설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중국 미사일 기술의 원칙, 조직방안, 발전 계획과 구체적 조치를 담고 있었다. 기본적인 원칙은 연구, 설계, 생산 3개 분야를 동시에 추진하되 시작할 때는 생산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이어 설계, 연구 순으로 진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연구기관과 학교에 있는 21명의 전문가 명단을 붙여 이들을 미사일 연구개발에 동원하기로 했다. 물론 당시 중국의 경제적 상황으로 보면 당장 미사일 개발에 착수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렇지만 첸쉐썬 의견을 담은 보고서는 미사일 기술 개발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중국 최고 지도부가 엄청난 돈을 들여 미사일을 연구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학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 1956년 3월 로켓, 미사일 개발 담당 항공산업위원회 극비 설치
1956년 3월 14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앙군사위 회의를 주재하면서 첸쉐썬이 마련한 건의안을 토론했다. 국방 항공 산업을 전담할 부처로 항공산업위원회를 만들기로 했고 저우언라이 총리, 네룽전(聶榮臻) 중앙군사위 부주석 겸 부총리, 첸쉐썬 3 사람이 로켓과 미사일 개발을 통괄 지휘하도록 했다. 항공산업위 산하에는 설계기구, 과학기구, 생산기구를 두기로 했다. 4월 13일 국무원은 네룽전 부주석을 신설 항공산업위원회 주임, 중앙군사위 비서장 황커청(黃克誠)과 제2기계공업부장 자오얼루를 부주임, 총참모부 장비계획부장 안둥(安東), 첸쉐썬을 위원으로 하는 항공산업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보안상 이유로 외부에는 당분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1956년 5월 26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앙군사위 회의에 출석해 네룽전이 이끄는 항공산업위원회가 제안한 중국 미사일 연구에 대해 토론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 회의에서 모든 조건을 갖춘 다음 생산을 개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미사일 연구와 제조 작업을 해야 한다, 산업 현장, 대학, 연구소, 군에서 인력을 동원하되 군이 앞장서야 한다고 지시했다. 1956년 8월 6일 항공산업위 관리기구인 국방부 5국이 출범했다. 로켓과 미사일 개발을 담당하는 컨트롤 타워였다. 첸쉐썬은 국방부 5국에서 제1부국장 겸 총공정사(총괄 엔지니어)를 맡았다. 이어 그는 항공산업위 연구기구인 국방부 제5연구원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1956년 10월 8일 국방부 제5연구원은 창립대회를 열었다. 국방부 제5연구원 초대 원장은 예상대로 첸쉐썬이 맡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첸쉐썬을 필두로 한 중국 원자탄 연구팀은 원자폭탄 및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 첸쉐썬을 중국으로 보낸 미국, 통한의 후회
이로부터 중국의 로켓과 미사일 개발은 첫 발을 내디뎠다. 첸쉐선이 귀국했을 당시 그와 함께 일했던 미국의 동료 과학자들은 이 천재 과학자가 조국에 돌아가서 농사나 지으면서 조용하게 지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중국에 돌아가서 중국 로켓과 미사일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미국 정부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일이 하나하나 현실이 되었다. 중국 첫 인공위성 발사, 중국 원자폭탄 개발에는 첸쉐썬 공로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덕분에 그는 ‘중국 로켓의 아버지, 중국 우주항공의 대부’라는 호칭을 얻었다.
◆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대부는 어제 나올 것인가
중국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힘은 첸쉐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9년 10월 31일 그가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을 때 13억 중국인은 그를 애도했다. 그는 13억 중국인의 가슴 속에 별이 되었다. 일본은 소행성 탐사선을 보내고 북한은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데 아직도 1단 로켓을 만들지 못해 쩔쩔매는 대한민국 우주 개발 대부는 과연 언제 나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