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홍인표의 권부비화

시진핑과 자다산의 우정과 의리 3

홍인표(洪仁杓) 고려대 연구교수|입력 2016-09-30 16:09
전례 없는 발탁인사로 정딩(正定) 현 문화국장에 기용된 자다산(賈大山)은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일단 현장을 중요시했다. 문제점을 찾아내 제도를 만들어 해법을 찾으려 했다. 특히 그동안 어수선했던 문화 분야 현안을 질서 있게 정리했다.

◆ 일벌레 자다산, 야전침대 놓고 공사 독려

창산(常山)극장은 정딩 현의 인민대회당이라고 부른다. 현에서 중요한 회의는 모두 여기서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에 지은 목조 건축물이어서 안전이 문제였다. 이 건물을 시진핑(習近平) 부서기가 새로 짓자고 제안했다. 자 국장은 극장 신축 공사장에 야전 침대를 놓고 공사를 독려할 만큼 일벌레였다. 정딩에 있는 룽싱(隆興)사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대형 사찰로 국보급 문화재였다. 서기 586년 수나라 문제(文帝) 때 세워졌다. 그러나 지은 지 너무 오래되고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해 낡았다. 전면 보수를 한다면 당시 돈으로 엄청난 3000만 위안이 필요했다. 이것은 티베트 라싸(拉薩)의 당나라 때 유물인 포탈라 궁에 이어 2번째로 많은 돈이 들어가는 공사였다. 시 부서기는 중국의 권위 있는 전문가들을 자주 불러 의견을 들었다. 실무 책임자인 자다산은 베이징(北京), 허베이(河北) 성 성도인 스좌좡(石家莊)을 수십 번 오가며 일처리를 하느라 심신이 극도로 피로했다. 위궤양까지 생겼다. 출장을 자주 다니면서 약병을 늘 달고 살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한약을 달여 먹었다. 마침내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아 거액의 보수예산을 따는 데 성공했다. 돈은 확보했지만 사찰 주변에 살고 있는 60가구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마침내 룽싱사 복구공사는 무사히 끝났고 정딩 현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춘제(春節) 때만 되면 그는 룽싱사 관리에 잔뜩 신경을 썼다. 목조 건축물이라 불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의 문화 사업을 위해 역량을 모두 쏟았다. 톈닝(天寧)사, 카이위안(開元)사, 린지(臨濟)사, 광후이(廣惠)사 보수와 정딩 현 문묘(文廟) 복원과 같은 수많은 문화재 복원에 자다산 문화국장의 땀이 배어 있다. 이 기간 시 부서기는 서기로 승진했다. 시 서기는 시간이 더 없었지만 그래도 틈을 내 평소와 같이 자다산과 만나 밤을 지새우곤 했다.
자다산 일가족 사진. 아래 앉은 사람 중 오른쪽이 자다산이다.
◆ 시진핑, 푸젠 성 발령 소식에 자다산 며칠간 말을 잊어

1985년 5월 어느 날, 자다산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알고 보니 시 서기가 사람을 보낸 것이다. 시 서기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고 이튿날 오전 7시 지프를 타고 떠난다는 전언이었다. 그동안 업무 인계를 하느라 바쁘게 일하다 지금 시간이 났으니 사무실로 잠시 와달라는 시 서기 요청을 전하러 온 것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자다산은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시진핑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날 밤, 우리는 마지막으로 얘기를 길게 나누었다. 서로 헤어질 때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흘렸다. 석별의 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이 헤어졌을 때 공교롭게도 새벽 3시였다. 시진핑은 자다산을 현 위원회 입구까지 바래다주었다. 서로 만감이 교차했지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전과 달랐던 점은 그날은 현 위원회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는 점이다. 자다산 아내는 그날 남편이 돌아오면서 당삼채(唐三彩. 세 가지 색깔로 만든 당나라 도자기) 2개를 품에 안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나는 낙타, 다른 하나는 말을 형상화한 도자기였다. 시진핑 서기가 사무실에 있던 것을 작별 선물로 준 것이다. 자다산은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곧 잠이 들었다. 이튿날 한낮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하지만 침대에서 일어난 다음에도 그는 멍한 표정이었다. 아내는 그가 병에 걸렸다고 여겨 약을 먹으라고 재촉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천천히 말했다. 시 서기가 다른 곳으로 전근 갔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4년 중국 공산당 기관지 광명일보에 기고한 자다산 회상기
◆ 시진핑, 푸젠 성 간 뒤 자다산에게 가끔 편지, 안부 전화

 시 서기는 정딩 현을 떠나 동남부 경제특구인 푸젠(福建) 성 샤먼(厦門) 시 부시장으로 옮겼다. 그는 푸젠 성에 있으면서도 정딩 현, 그리고 오랜 친구 자다산을 잊지 않았다. 시간을 내 안부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자다산은 답장을 거의 보내지 않았다. 이후 시진핑도 일이 바빠 그에게 편지를 거의 보내지 못했다. 어쩌다가 자다산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안부를 묻곤 했다. 시닌핑은 인편으로 여러 차례 자다산에게 편리할 때 푸젠 성에 오라고 초청했다. 하지만 그는 시진핑이 바쁜데 굳이 폐를 끼칠 필요가 없다면서 푸젠 성에 가지 않았다. 어쩌다가 정딩 현 사람들이 푸젠 성을 찾아올 때면 시진핑은 그들을 통해 조그만 선물을 자다산에게 전달했다. 해마다 춘제 전날에는 시진핑이 자다산에게 연하장을 보냈다.
‌  1991년 춘제 때 정딩 현을 떠난 지 6년이 되던 해 시진핑은 정딩 현 초청을 받아 제2의 고향인 정딩 현을 찾았다. 당시 시진핑은 푸젠 성 샤먼(廈門) 시 닝더(寧德) 지방위원회 서기를 거처 푸젠 성 푸저우(福州) 시 서기로 일할 때였다. 시진핑은 시간을 내 자다산 집으로 찾아갔다. 당시 그는 때마침 9년 동안 일했던 현 문화국장에서 물러나 자문기구인 정딩 현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으로 있었다. 시진핑과 만났을 때 그는 여전히 활달하고 유머가 넘쳤다.  간부였지만 소설 창작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자다산은 당시 49세로 정력이 넘치고 창작의 욕망이 강렬했던 황금기였다. 그는 무슨 소설을 잡지에 발표했고, 어떤 소설은 여러 개의 잡지에 나란히 실렸다고 자랑이 대단했다. 지금 구상을 하고 있는 작품이 무엇인지도 자세히 설명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해 두 사람은 오래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아쉽지만 헤어져야 했다.

‌ ◆ 자다산, 1997년 식도암으로 55세에 하늘나라로

‌  1995년 가을 푸저우 시 서기로 있던 시진핑은 지인으로부터 자다산이 식도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수술은 성공이라고 했지만 시진핑은 자다산의 건강이 걱정이었다. 수시로 그가 회복했는지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소식은 똑같았다. 호전이 쉽지 않아 날마나 몸이 말라간다는 전언이었다. 1997년 춘제 즈음 자다산은 검사를 받기 위해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셰허(協和)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시진핑은 당시 푸젠 성의 2인자인 부서기로 승진한 상태였다. 때마침 베이징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러 갔던 시진핑은 시간을 내 자다산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갔다. 자다산은 더 이상 과거 모습이 아니었다. 안색이 초췌하고 몸이 앙상했다. 병상에 누워 끊임없이 기침을 했다. 깊이 파인 두 눈만 형형하게 빛날 뿐이었다. 자다산은 시진핑의 손을 잡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어 평정을 되찾은 뒤 병의 경과를 설명했다. 시진핑은 침상머리에 앉아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다. 병실을 나서면서 시간을 내서 반드시 정딩을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불과 열흘이 지난 1997년 2월 9일, 음력 정월 초사흘, 시진핑은 약속한 대로 정딩을 찾았다. 당시 자다산은 체력이 이미 소진된 상태였다. 얼굴은 초췌했고 몸은 더욱 야위었다. 목소리는 갈라졌고 눈동자는 흐릿했다. 몇 마디를 하고는 이내 거친 숨을 내쉬었다. 당시 시진핑은 그가 세상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슬픈 감정이 솟구치면서 시진핑은 자신도 모르게 자다산의 손목을 힘껏 쥐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 모습을 모고 자다산은 오히려 침착하게 시진핑을 위로했다.
‌   시진핑이 기념사진이나 찍자고 말했다. 자다산은 웃으면서 사람 모양이 아닌데라고 하면서도 포즈를 취했다. 2월 21일 시진핑이 정딩을 떠난지 10여일만에 갑작스레 전화벨이 울렸다. 투병 중이던 자다산이 2월 20일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향년 55세였다. 시진핑은 직접 조문을 하려 했지만 시간을 내지 못해 인편으로 조화를 보냈다.

‌◆ 시진핑, 국가주석 취임 후 자다산 사망 17년 만에 중국 관영 언론 시-자 우정 크게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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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과 자다산의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은 자다산이 세상을 뜬지 17년이 지난 2014년 갑자기 관영 언론이 앞장서면서 눈길을 끌었다. 그해 1월 당 기관지 광명일보는 시진핑 주석이 자다산이 세상을 뜬 지 1년 뒤인 1998년 푸젠 성 부서기 시절 썼던 <자다산을 기억하며>라는 글을 실었다. 이어 2월에는 자다산 기일에 맞춰 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자다산과 같은 허베이 성 출신의 톄닝(鐵凝) 중국작가협회 주석이 쓴 추모의 글을 실었다. 이들의 우정이 뒤늦게 주목을 받은 이유는 친구의 불행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시진핑의 인간미를 보여주면서 최고지도자로서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배어있는 관영 매체들의 보도였다.
시진핑과 자다산의 우정과 의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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