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홍인표의 권부비화

시진핑과 자다산의 우정과 의리 1

홍인표(洪仁杓) 고려대 연구교수|입력 2016-08-23 18:08
시진핑 당시 푸젠성 부서기가 1997년 2월9일 병석에 누운 자다산을 찾아가 위로하고 있다. 자다산은 시진핑 병문안을 받은 지 불과 11일만인 2월20일에 세상을 떠났다.
1982년 3월, 29세의 시진핑(習近平, 1953~)은 인민해방군 지휘부인 중앙군사위원회를 떠나 허베이(河北) 성 정딩(正定) 현 부서기로 부임했다. 정딩 현은 베이징에서 서쪽으로 300km 떨어진 곳에 있는 농촌이다. 문화 유적이 많았다. 삼국시대 유비(劉備)를 보좌했던 상산(常山) 조운(趙雲, 자는 자룡)의 고향이었다. 상산은 정딩의 옛날 이름이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문화혁명이 끝난 지 6년이 지났지만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문혁 때 농촌에 갔던 도시 출신 지식청년들은 서둘러 자기 집이 있는 도시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도시 청년들은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외국 유학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은 농촌으로 달려가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시진핑은 칭화(淸華)대학을 졸업한 뒤 1979년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 겅뱌오(耿飆, 1909~2000) 비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겅 비서장은 예젠잉(葉劍英) 원수 측근으로 문혁의 주범인 4인방 체포 당시 크게 활약해 잘 나갔지만 새롭게 떠오른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은 그를 그다지 탐탁찮게 여겼다. 모시고 있던 겅뱌오가 비서장에서 물러나면서 시진핑은 중앙군사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농촌에 가서 일할 수 있도록 중앙조직부에 요청했고 그래서 얻은 자리가 정딩 현 부서기였다.

1991년 당시 푸젠성 푸저우시 서기이던 시진핑이 부인 펑리위안 여사와 함께 정딩현에 가서 자다산과 만났다.
시진핑이 정딩에 부임한 다음 가장 먼저 찾은 인사는 자다산(賈大山, 1942~1997)이었다. 자다산은 정딩 현 출신으로 당시 이름난 작가였다. 시진핑은 부임 이전에 자다산 소설 작품을 여러 편 읽으면서 유머감각 넘치는 문체와 예리한 분석, 아름다운 묘사에 매료된 상태였다. 그는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문학계 인사인 리만톈(李滿天, 1914~1990)을 앞세워 자다산을 찾아다녔다. 먼저 그의 집에 들렀다가 당시 자다산이 몸담고 있던 정딩 현 문화관으로 찾아갔다. 리만톈은 당시 중국작가협회 허베이 성 주석으로 때 마침 창작 활동을 위해 정딩 현에서 살고 있었다. 자다산과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당시 자다산은 사무실에서 문학 동호인들과 작품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교사, 극작가, 감독, 배우를 한 적이 있을 만큼 모르는 게 없고 입담도 대단했다. 당시는 문학의 시대였다. 가는 곳마다 문학청년이 있었다. 가는 곳마다 문학토론회가 열렸다. 시진핑은 녹색의 낡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에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래도 20대 젊은이였다. 어떻게 보면 군대를 막 제대한 군인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수줍은 문학청년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시진핑이 리만톈 안내로 사무실로 들어섰을 때 한참 토론에 열을 올리던 자다산은 연설을 멈추지 않았다. 시진핑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아 조용히 그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자다산이 물을 마시는 틈을 타 리만톈이 그를 소개했다. 그때서야 자다산은 키가 크고 마른 편인 젊은이가 새로 부임한 현의 2인자 고위간부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자다산의 첫 반응은 시진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자다산은 머리를 돌리면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와서는 우리를 어쩌겠다는 겁니까. 이 말은 시진핑을 데리고 온 리만텐에게 나지막하게 건넨 말이었지만 시진핑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자다산은 만 40세로 혈기가 넘쳤다. 작품이 고교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잘 나가는 소설가였고, 꼬장꼬장한 성격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자기보다 11살 연하인 처음 보는 당 간부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진핑은 그의 발언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현장 분위기는 일순 어색한 듯 했지만 곧 활기를 찾았다. 주인과 손님은 악수를 나누었다. 시진핑은 훗날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처음 만났지만 마치 오랫동안 못 본 친구 같았다. 다양한 화제를 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헤어질 때 배웅을 하지 말라고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한 듯 했다. 우리는 걸어 나오면서 말을 하다보니까 어느 듯 현 문화원 입구까지 나와 헤어졌다.


자다산 생전 모습
자다산은 1942년 7월 정딩에서 태어났다. 조상 대대로 잡화점을 하고 있어 그나마 먹고 살만은 했다. 위로 8명의 누나가 있었고 그가 9번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는 중국 전통의 경극을 좋아했다. 그리고 문학은 더욱 좋아했다. 고교 다닐 때부터 작품을 발표했다. 고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출신성분이 좋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석회 공장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농촌으로 갔다. 이런 경험 덕분에 그는 땀 냄새가 물씬 풍기는 농촌 문화에 익숙했고 이것이 그를 작가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1977년 그는 단편소설 <취경(取經. 불경을 구하다)>을 발표해 문단을 놀라게 했다. 이 작품으로 제1회 중국 우수 단편 소설상을 받았다. 문화혁명 이후 허베이 성에서 중국 문학 분야 최고상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자다산은 몸집은 중간이었지만 탄탄했다. 그의 용모에 대해 가까운 친구였던 톄닝(鐵凝, 현 중국작가협회 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얼굴이 대추 같고, 입은 크고, 눈썹이 검다. 머리카락은 짧고 단정하며 맑은 눈을 갖고 있었다. 세상을 꿰뚫어 보는 듯 했다.

그는 천재 형 소설가였다. 창작 습관이 독특했다. 마음속으로 먼저 구상을 다듬고 그런 다음 펜을 드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한 다음 친한 친구들을 불러 자신의 구상을 일일이 암송했다. 그는 기억력이 마치 명료한 컴퓨터 스크린과 같았다. 친구들이 그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면 다시 고친 다음에 암송했다. 이런 방식을 거친 뒤 그가 원고지에다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구절 하나하나가 주옥과 같았다. 그런 다음 작품을 세상을 내놓았다.

☞시진핑-자다산 우정 ②편은 25일 오전 5시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