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홍인표의 권부비화

시진핑과 자다산의 우정과 의리 2

홍인표(洪仁杓) 고려대 연구교수|입력 2016-09-26 21:09
정딩현 부서기 시절 시진핑이 사무실에 앉아 있다.
◆ 11살의 차이, 문화혁명의 고난 경험 강한 동질감

시진핑(習近平) 정딩(正定) 현 부서기가 자다산(賈大山) 같은 정딩 현의 문화관 부관장과 만난 지 며칠이 지났다. 이번에는 자다산이 시진핑 사무실을 찾았다. 현 당위원회 건물은 옛날 정딩부 관아가 있던 곳이다. 현 부서기 사무실은 시진핑이 숙소를 겸하고 있는 곳이었다. 침대 하나, 서랍 세 개가 있는 책상 하나, 의자 두개, 보온병 하나, 갓 없는 전등 하나가 전부였다. 서가도 없어 창틀이나 책상 위에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자리에 앉은 다음에 그들은 서로 나이를 물어보았다. 자다산은 말띠였고, 시진핑은 뱀띠였다. 자다산이 11살 연상이었다. 그래서 그가 형님이 되었다. 그런 다음 차를 나누고 담배를 피우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그들은 확실한 서로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우선 가정 문제 때문에 고생을 한 것이 같았다.

◆ 시진핑, 산시 성 농촌서 분뇨 나르고 농사

시진핑은 문화혁명이 시작된 이후 산시(陝西) 성 북부 지방 농촌으로 내려갔다. 불과 16세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이런 고통은 부친(習仲勳)이 억울한 사건에 연루되어 실각했기 때문이다. 자다산은 상인 집안 출신이어서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 196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다 농촌으로 쫓겨 갔다. 시진핑은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분뇨통을 나르고 힘들고 궂은일은 무슨 일이든 다 했다. 숙소인 동굴 안은 이가 너무 많아서 엄청나게 고생했다. 온 몸이 이에게 물어 뜯겨 물집이 생겼을 정도였다.

◆ 자다산, 농촌서 선전원, 배우에 연출까지

자다산도 1년 내내 힘들고 거친 일을 해야 했다. 그들은 고통을 겪으면서 얻는 것도 있었다. 시진핑은 농민들과 열심히 일하면서 인민공사 대대 당지부 서기로 추천받았다. 자다산은 농촌에서 선전원을 맡아 스스로 단막극을 만들고 배우에 연출까지 맡았다. 이 덕분에 허베이(河北) 성과 화베이(華北) 지방에서 문예부문 상을 휩쓸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그들이 농촌에서 보낸 시절이 똑같이 7년이었다. 현실 문제에 대해 그들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정딩 현이 식량 생산은 많지만 국가에 바치는 목표량이 너무 많아 농민들은 결국은 다른 곳에서 고구마를 사서 끼니를 해결하는 문제. 정딩 현의 역사 문물을 어떻게 보호할 것이냐. 사회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풍조를 어떻게 고칠 것이냐를 놓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시진핑 주석은 문화대혁명 시절 산시 성 옌촨 농촌으로 하방돼 7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시 주석이 농기구를 들고 농민들과 함께 들일을 하러 나가고 있다.
◆ 의기투합, 시국 토론하다 보면 금방 새벽

자다산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미 새벽 3시가 넘었다. 현 당위원회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경비실 창문은 불이 꺼져 암흑 세상이었다. 대문은 높이 2미터여서 뛰어넘기도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심야에 3월이라 날씨도 차가왔다. 곤히 잠들어 있는 경비원을 깨우는 수밖에 없다고 자다산은 생각했다. 이 때 갑자기 시진핑이 땅에 주저앉아서 어깨에 올라타라고 손짓을 했다. 자다산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시진핑 어깨에 올라탄 자다산은 두 손으로 대문 철책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넘어섰다. 자다산은 과거 무술을 배운 적이 있어 몸놀림이 가벼웠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그리고 대문을 사이에 두고 작별인사를 했다.

◆ 시진핑은 정치, 철학, 경제 관심↔자다산은 문학, 역사, 불교에 관심

 이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은 만나기 시작했다. 시진핑 사무실에서 만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다산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차이도 많았다. 시진핑은 여러 책을 두루 읽는 편이었다. 특히 정치, 철학, 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자다산은 문학, 역사, 불교에 집중했다. 현실 문제에 대해 시진핑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힘든 일이 있고 앞날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줄곧 낙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자다산은 관직 생활에 큰 미련이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 공청단에 입단하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허베이 성 작가협회는 여러 번 허베이 성 성도(성 정부가 있는 도시)인 스자좡(石家莊)에 와서 일하자고 권유했으나 그는 한사코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작가였다. 현실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현실을 분석하는 것이 작가의 기본이었다. 그가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은 현장의 간부와 보통 농민들과의 관계를 그린 것이었다. 정딩 현이라는 고향, 국가, 민족에 대해 그는 깊은 사랑과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는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다보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새벽 2시나 3시가 되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늦게까지 대화를 나누었나. 그것은 문화혁명 시기의 잔재였다. 문혁 당시 회의가 새벽까지 열리는 것은 다반사였다. 더구나 당시는 즐길만한 게 없었다. 그저 책을 읽거나 아니면 마음에 맞는 친구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이 밤을 지새우는 가장 좋은 방식이었다.

◆ 시진핑, 자다산을 3단계 올려 발탁, 문화국장에

 1982년 12월 23일 오후, 시진핑이 자다산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자 자다산은 “오늘은 구내식당에서 식사하지 말고 우리 집에서 밥 한 끼 합시다”라고 말했다. 자다산은 시진핑과 알고 지낸지 1년 가까이 지났지만 한 번도 집에서 식사 대접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동안 자다산은 여러 번 식사 초대를 했지만 번번이 시진핑이 거절했다. 그저 차 한 잔이면 족하다는 것이었다. 시진핑은 이번에는 워낙 간곡한 청이라 거절하지 못했다. 시진핑은 문인 리만톈(李滿天)과 함께 자다산 집을 찾았다. 자다산이 대접한 음식은 양고기를 살짝 익혀 먹는 훠궈(火鍋) 요리였다. 열기가 오르면서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현 문화국 상황에 이르렀다. 현 문화국은 산하에 극단, 신화서점, 문화관, 문서보관소 등 7개 기관을 두고 있었다. 인원은 모두 400명 정도였다. 모두들 개성이 강한 지식인과 배우들이라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내부 갈등이 심각했다. 더욱이 정딩 현에 9개의 국가 문화재가 있지만 오랫동안 보수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리만톈이 농담처럼 말했다.
“자다산. 당신이 문화국장을 맡으면 일처리를 제대로 할 수 있나?”
자다산은 어렸을 때부터 현지 문화계 인사들과 잘 알고 지냈을 뿐 아니라 현직 문화관 부관장이라 누구보다 사정에 정통했다. 고향에 있는 어느 탑이나 어느 불상이나 모두 훤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는 취기가 오른 김에 “물론 가능합니다. 내게 맡겨만 준다면 깔끔하게 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호언했다. 그리고는 문화국장이 되면 이런 일을 하겠다고 줄줄이 말했다. 그러자 시진핑 부서기가 끼어들면서 “좋습니다. 선생이 이제부터 현의 문화국장을 맡으십시오”라고 말했다. 자다산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자다산(오른쪽)이 1990년 여름 정딩 현을 찾은 유명 문인인 왕쩡치(汪曾祺)와 함께 정딩 현의 고찰인 룽싱(隆興)사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자다산, 강직, 열정, 행정력, 3박자 갖춰

 그런데 시진핑은 이 말을 불쑥 꺼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동안 문화국 난맥상에 대해서 문제점을 파악했고 국장 인선을 위해 나름 고심하고 있었다. 허위(何玉) 문화 담당 부현장과 의견을 나눈 끝에 자다산을 후임 국장으로 임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인선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자다산이 성품이 강직하고 소설을 잘 쓸 뿐 아니라 행정능력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화재, 문화 사업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열정이었다. 3박자를 모두 갖춘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관직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여러 번 교류를 통해 시진핑은 자다산의 성격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서 현 당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자다산에게 문화국장을 맡기자고 제안했고, 승인을 받은 것이다. 시진핑은 그날 밤 자다산에게 이런 인사내용을 미리 통보하러 간 길이었다. 시진핑은 이제는 소설만 써서는 안 됩니다. 정딩의 문화사업전체를 위해 공헌해야 합니다. 이렇게 당부했다. .
 자다산은 시진핑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당시 당원이 아닌 인사가 현의 간부를 맡는다는 것, 특히 정식 국장 자리를 맡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당원이 아닌 자다산은 일약 현 문화국장을 맡았다. 문화국 산하 문화관 부관장에서 3단계 벼락승진(관장, 부국장, 국장)을 승진한 것이다. 정딩 현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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