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문일현의 북경통신

대드는 싱가포르, 난감해 하는 중국…한국은?

문일현(文日鉉) 중국정법대 교수|입력 2016-08-31 19:08

◆ 미중 사이에서 살아남은 비책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살아남는 비책은 무엇인가?”
“국제법과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작은 나라는 생존 기회마저도 없어지게 된다.”

싱가포르 리셴룽(李顯龍)총리의 연설이 적잖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21일 독립기념일 행사 때 혼절 직전 주변 부축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던 상황에서 했던 그 연설이다.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기는 싱가포르도 한국과 비슷한 처지다. 교역 규모 1위, 투자 대상 1위, 중국인 관광객 1위 등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매우 높다. 더군다나 인구의 70% 이상이 대륙에서 건너온 화교출신이여서 혈연적으로 중국과 특수한 관계다.

싱가포르 야경
국제상설중재재판소 판결을 계기로 미·중 간, 중국·아세안 간 남중국해 분쟁이 정점으로 치달았던 지난 7월. 미·중 양국으로부터 엄청난 압박에 시달려온 싱가포르의 입장은 의외로 단호했다. 핵심은 세 가지다. 국제법은 지켜져야 하고, 항행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며, 아세안은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 싱가포르의 3원칙

리총리는 왜 그런 입장을 취해야 했는지 이번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소상히 설명했다. 우선 국제법이 지켜져야 하는 이유. 대국들은 국제법을 자국에 유리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심지어 지키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작은 나라는 그럴 수 없다. 국제법이 무시되면 소국들은 기댈 언덕이 없어져 생존 기회조차 없어진다. 힘이 곧 정의로 통하는 국제관계는 결코 지지할 수 없다. 때문에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과 국제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항행의 자유는 생존의 문제다.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 남쪽 끝에 위치하면서 말라카해협과 싱가포르해협 사이에 끼여 있다. 남중국해는 싱가포르를 세계와 연결시키는 사활적 동맥이고 뱅골만과 맞닿아 있는 말라카해협도 생명선이긴 마찬가지다. 어느 하나라도 막히거나 봉쇄되면 싱가포르는 바로 질식사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싱가포르. 국토면적은 697㎢로 서울(605㎢)보다 약간 크고 인구는 557만 명의 작은 나라다. 하지만 ‘할 말을 할 줄 아는 나라’다.

아세안의 단결은 현실 정치다. 싱가포르 한 나라보다는 인구 6억 명을 거느린 아세안의 이름으로 대처하는 게 영향력도 훨씬 크고 효과적이다.

◆ 중국의 3불(不) 정책과 정면충돌

싱가포르가 표방하는 남중국해 3원칙은 중국의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중국이 남중국해 영해기선이라고 주장하는 9단선을 ‘근거 없음’으로 판결했다. 싱가포르는 이 판결은 유엔해양법협약이라는 국제법에 기초한 정의(定義)이므로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정치적 판결이므로 참여도, 수용도, 집행도 않는다는 중국의 ‘3불’(不) 정책과는 정반대다.

이 뿐 아니다. 항행의 자유는 곧 생존이라는 싱가포르 주장은 미국의 논리와 똑 같다. 미국은 제3국 간 영유권 분쟁에는 간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지만 항행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내세워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권 운운하며 대드는 싱가포르가 중국으로선 달가울 리 만무하다. 아세안 단결도 마찬가지다. 중국이라는 거인에 맞서려면 아세안이 똘똘 뭉쳐야 한다는 게 싱가포르 전략이다. 분쟁 당사국과 일대일 협상으로 풀자는 중국 측 제안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 중국의 전방위 압박

이런 상황에 가만히 있을 중국이 아니다. 중국 언론의 무차별 비난은 물론이고 중국 내 친지, 친구, 파트너들로부터는 “중국과 그런 관계로 가서 좋을 게 없다”는 협박성(?) 충고가 쏟아진다. 심지어 상당수 싱가포르인들마저 중국의 이런 주장에 동조한다. 자국을 죄어오는 중국의 압박이 전방위(全方位)적이라고 총리가 실토할 정도다.

시진핑 중국국가주석과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작금의 상황은 중국과 경제협력이 흐트러지거나 아니면 미국과 안보협력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한 위기국면이다. 리총리는 이런 미묘하고 복잡한 현실에서 어떤 게 국가 전체 이익에 더 부합하는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미·중과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길 원하지만 그럴 수 없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음을 이해해달라는 간곡한 당부도 곁들이고 있다. 국가지도자가 직접 정책 결정의 배경을 소상히 설명하며 국민들의 이해를 구하고 있다는 게 우리와는 다른 점이다.

◆ 최고지도자, 국민 상대 소상히 설명, 이해 구해

중국은 난감해 하고 있다. 싱가포르 해협은 중국의 해외수입 원유 80% 이상이 반드시 경유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지나치게 압박하면 싱가포르를 미국의 품으로 떠밀어내는 우(愚)를, 그렇다고 그냥 놔두면 두고두고 우환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군다나 싱가포르는 내후년까지 아세안과 중국 간 남중국해 문제를 조율하는 조정국(the country coordinator for ASEAN-China Dialogue Relations) 역할도 맡고 있다. 또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창립멤버이고 일대일로가 성공하려면 싱가포르의 협력이 절대적이다.

싱가포르는 고비 때마다 중국에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특수한 관계다. 리총리 부친이자 국부인 리콴유(李光耀)총리는 덩샤오핑(鄧小平)에게는 개혁개방 정책을, 장쩌민(江澤民)주석에게는 법치(法治)를 조언했다. 수교 후 37년 동안 33차례 중국을 방문한 라오펑요우(老朋友)이기도 하다.
싱가포르 총리부부가 8월초 백악관을 공식 방문해 오바마 대통령 부부와 함께 환호하는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답례하고 있다.

동시에 중국이 일방적으로 실력을 행사할 조짐을 보이자 미국에 아시아 귀환(Pivot to Asia)이 필요하다고 촉구함으로써 중국의 역린을 건드린 것도 바로 그다. 중국인들 표현대로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다. 리 총리는 9월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양국 모두 뭔가 돌파구를 기대하는 눈치이지만 현재 분위기로 보면 쉽지 않을 전망이다.

◆ 싱가포르의 타산지석(他山之石), 한국은?

한국을 비롯한 과거 아시아의 네 마리 용(龍)은 한결 같이 중국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한국과 싱가포르는 중국과 안보·경제 문제로, 홍콩과 대만은 ‘1국2체제’(一國兩制) 때문에 동병상련이다. 싱가포르 총리의 혼절 연설이 이를 상징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대국과 소국이 평화롭게 공존공영 할 수 있을까... 미·중의 충돌 과정에서 혹 유탄이나 맞지 않을까... 약소국가들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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