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광종의 한자와 중국어

중국의 용퇴(勇退) 선각자, 범려(范蠡)

유광종(劉光鍾)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입력 2016-10-28 00:10
범려 인물도. 출처: 중국 바이두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 구천(勾踐)을 도와 오(吳)나라를 꺾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 사람이 있다. 범려(范蠡 BC536~BC448 추정)라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 중에서도 유방(劉邦)의 책사 장량(張良)과 함께 지혜가 매우 뛰어난 사람으로 꼽힌다. 그런 그가 월나라 왕 구천과 함께 오나라를 제압했을 때 보인 행동이 이채롭다.

◆ 범려, 혁혁한 공로 세운 뒤 곧바로 용퇴(勇退)

그는 숨어 지내는 길을 택했다. 오나라를 무찌르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따라서 일등공신의 자리는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사랑한 여인 서시(西施)와 함께 강호(江湖)로 숨어들어 이름을 바꾼 뒤 상인으로서 거대한 부를 쌓았다.
그는 자신이 받들었던 월나라 왕 구천의 사람됨을 믿지 않았다. 함께 어려운 시절을 겪을 수는 있으나 성공을 거둔 뒤에 그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일찍이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공 뒤에 다가오는 달콤한 유혹을 모두 끊고 강호에 몸을 맡긴다. 그런 그의 행동을 두고 중국인들은 거센 물길에서 용감하게 물러난다는 뜻의 ‘급류용퇴(急流勇退 혹은 激流勇退)’라는 표현을 쓴다.
물러나는 행위인 退(퇴)라는 글자 앞에 왜 하필이면 용기라는 의미의 ‘勇(용)’을 붙였을까. 그런 용기의 본질은 ‘과단(果斷)’에 있다. 이 과단이 무엇인가. 열매를 뜻하는 果(과)와 단호히 끊는다는 뜻의 斷(단)이 붙었다. 앞의 果(과)는 ‘열매’ ‘과실’의 새김에서 발전해 ‘단단하게 맺어진 상태’의 의미까지 얻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果斷(과단)’은 ‘과감하게 끊어 버리다’의 뜻이다.

◆ 나아가는 것보다 어려운 게 제때 물러나는 것

사실 나아가는 행위보다 물러나는 일이 더 어렵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감성체인 사람은 그로부터 다시 번지는 수많은 욕망에 눈과 마음이 쉽게 어두워진다. 따라서 그런 욕망을 끊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물러남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굳이 ‘勇退(용퇴)’라고 적었을 테다.
나아가고 물러남은 모두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때를 맞추지 못하면 실패한다.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이름은 이름대로 무너진다. 이를 중국에서는 ‘身敗名裂(신패명렬)’이라고 적는다. 늑대가 웅크렸던 자리처럼 이름이 볼썽사납게 망가진다는 뜻에서 ‘聲名狼藉(성명낭자)’라고 표현키도 하며, 냄새나는 이름이 멀리 퍼진다고 해서 ‘臭名遠揚(취명원양)’이라고도 적는다.
요즘 청와대의 비선 실세로 활동한 최순실(60·개명 최서원)이라는 여인이 연일 인구(人口)에 회자되고 있다. 대통령은 비선에 의지하다가 정상의 틀을 비정상의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모든 문제의 핵심은 대통령의 안목, 식견에서 비롯했다. 잘못 나아간 길이다. 착오와 오류가 나타나면 가던 길을 멈추고 길을 돌아와야 한다.


말타는 범려. 출처: 중국 바이두
◆ 잘못 걸었으면 되돌아가야

걸음을 뗀 지점에서 잘못이 번진 원인을 찾아내 그를 고치면서 갈 길을 서둘러야 마땅했다. 한 번 잘못 디딘 걸음은 용기 있는 후퇴로 만회할 수 있다. 그러나 나아가고 물러섬의 기본 스텝을 아예 의식하지 못했다. 대통령의 결정적인 착오다. 거대한 풍파로 발전한 오늘의 사태는 다 그런 토대에서 번졌다.
나아가고 물러섬의 진퇴(進退)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쟁터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 대상이다. 세상을 이끄는 경세(經世)와 치국(治國)의 마당에서도 그 점은 더 따질 필요가 없다. 며칠 전 대통령의 사과 연설문을 들으면서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물러서는 일에 그리 인색하면 이미 번진 문제를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그런 상황에 가장 필요한 일은 과감한 후퇴였다. 용기 있는 물러섬, 즉 용퇴였다는 얘기다. 아버지의 후광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굳센 의지를 바탕으로 권력 정점에 다가선 일은 박근혜 대통령이 나름대로 보인 용기다.

◆ 소용(小勇) 아닌 대용(大勇)을

그러나 권력을 잡은 그 마음가짐은 어찌 보면 작은 용기, 즉 ‘소용(小勇)’이리라. 국가의 현직 원수로서 자신과 사회, 나아가 국가의 명예까지 생각해 이미 벌어진 자신의 잘못을 털고 가는 큰 용기, ‘대용(大勇)’은 박 대통령에게 찾아볼 수 없는 덕목이다. 이로써 위기의 징후는 바야흐로 훨씬 더 깊어지고 있다.


<한자 풀이>
急(급할 급): 급하다, 빠르다, 재촉하다 등의 새김이다. 급행(急行)은 자주 쓰는 단어. 급절(急切)이라고 적으면 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뜻한다.
流(흐를 류): 물길의 흐름을 지칭한다. 퍼지다, 번지다, 전해지다 등의 뜻도 있다.
果(열매 과): 식물이 맺는 열매의 뜻. 단단하게 굳어지는 상황을 의미해 과감(果敢)이라는 뜻도 얻었다. ‘과연 그럴까?’의 과연(果然)이라는 새김도 있다.
斷(끊을 단): 결단(決斷)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인다. ‘단호(斷乎)함’은 확실하게 끊는 동작의 형용.
勇(용기 용): 두려움이 적은 사람에게 따라붙는 글자다. 과감하며 주저하지 않으며, 주눅이 들지 않는 사람의 성격.
급류용퇴(急流勇退): 거센 물길 앞에서 용기 있게 물러나는 일. 중국 성어지만, 우리말에서도 쓰인다.
臭(냄새 취, 맡을 후): 보통은 나쁜 냄새다. 구린내 정도로 이해하면 좋다.

<중국어& 성어>
急流勇退 jí liú yǒng tuì 뜻은 위와 같다. 激流勇退 jī liú yǒng tuì라고도 한다.
身敗名裂(身败名裂) shēn bài míng liè 몸이 망가지는 게 身敗, 이름이 이리저리 찢기는 게 名裂. 몸이나 이름(사실은 명예다) 중 하나라도 건지면 OK. 둘 다 건지면 ‘짱~’. 그 둘 모두 놓치면 비참해진다.
聲名狼藉(声名狼藉) shēng míng láng jí 聲名은 곧 명예 또는 이름을 가리킨다. ‘狼藉’는 늑대의 굴 속 녀석들이 머물렀던 자리에 관한 형용이다. 나무 가지 등을 모아놓은 그 자리에 늑대가 머물렀다 사라지면 형편없이 엉클어진다. 그런 상태를 이름이다. ‘유혈(流血)이 낭자하다’라는 우리말 표현에도 등장한다. 끝 글자 藉의 독음에 주의하자.
臭名遠揚(臭名远扬) chòu míng yuǎn yáng 나쁜 냄새 나는 이름이 멀리 퍼진다의 뜻. 臭 chòu는 중국어에서 아주 고약하게 쓰이는 글자다.
范蠡 fàn lǐ: 그의 생애는 워낙 유명하다. 정계에서 물러나 뛰어난 지혜로 돈을 많이 벌어 중국인에게 재물 신으로까지 추앙을 받는다. 바꾼 이름이 陶朱라 해서 흔히들 ‘陶朱公’이라고도 적는다. 음식점이나 상점 등의 가게 명칭에서 이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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